티스토리 뷰

부천필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시리즈

Complete Bruckner Symphonies - DEM LIEBEN GOTT - 사랑하는 나의 신에게

 

 

지휘/임헌정

연주/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007. 11. 27. 저녁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함으로써 말러 신드롬을 일으켰던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나는 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임헌정의 팬이다. 그의 무대 위에서의 카리스마와 그만의 개성 있는 음악을 나는 좋아한다. 3년 전쯤, 서울대학교 정기연주회의 무대에서 처음 보게 된 지휘자 임헌정은 카리스마가 넘치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인상의 지휘자였다. 당시에 이 지휘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유명세를 가지고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나는 이 지휘자의 실력을 신뢰하게 되었고 그에게서 알 수 없는 매력을 느꼈었다. 

 

이런 임헌정을 상임 지휘자로 두고 있는 부천 필하모닉의 오케스트라 역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국내 무대뿐 아니라 해외 무대에서도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부천 필은 단원들의 자부심과 열정 또한 대단하다. 서울이 아닌 부천, 게다가 전용 음악홀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으면서도 지휘자에 대한 믿음과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에 지금까지 단원들은 부천 필을 떠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런 대단한 지휘자와 대단한 오케스트라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바로 11월 말에 있었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실기시험에 대한 부담감이 좀 있긴 했지만, 부천 필의 연주를 통해서 나의 음악과 기분을 다시 refresh 하기 위해서라도 공연장을 찾게 되었다.

 

이날의 연주 프로그램은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미완성 교향곡>과 브루크너 교향곡 제9번이었다. 브루크너 교향곡은 부천 필이 말러 시리즈에 이어 도전하는 전곡 연주 시리즈였다. 앞으로 3년에 걸쳐 브루크너 교향곡을 연주한다고 하니 또다시 브루크너 신드롬을 일으킬 부천 필하모닉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이날은 브루크너 전곡 연주회의 첫 스타트를 끊는 날이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연주를 보기 위해 연주회장에 왔다.

 


 

1부에 연주될 곡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었다.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31~1828.11.19)는 베토벤으로부터 이어지는 낭만파의 흐름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킨 인물이며, 독일 가곡에서의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의 재능은 성악곡뿐만 아니라 교향곡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는데, 특히 이 8번 교향곡에서 나타나는 선율의 아름다움은 천상의 노래라고 불리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유려한 멜로디이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이 "미완성"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고전, 낭만파 교향곡들이 대개 4악장으로 구성되는데 비해 유달리 이 곡만 2악장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교향곡이 완성되지 않은 이유는 슈베르트의 개인적 사정 때문인지, 그 당시 음악가들을 크게 매혹시킨 베토벤(베토벤의 작품 수준에 이르지 못한 슈베르트의 좌절) 때문인지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참 많은 독특성들이 발견된다. 바로 그 독특성은 작품의 치밀한 설계와 무계획성이라는 대립되는 상황이 하나의 작품 속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선율들이 3도라는 단 하나의 음정 단위를 중심으로 치밀하게 설계되었는가 하면 모든 악장이 하나의 박자로 구성되었다는 일반적인 교향곡 형식에 있어서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슈베르트는 그 안에서 화성의 미묘함과 풍부한 선율 라인으로 음악을 듣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부천 필하모닉 단원들과 지휘자가 등장했고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고요 속에서 연주되기 시작했다. 1악장은 첼로의 서주로 잔잔하고 부드럽게 시작되었으며 바이올린의 부스럭거리는 듯한 연주가 이어지다가 그 위로 목관악기가 선율을 노래했다. 목관악기의 선율은 애처롭고도 슬프게 들렸다. 찬 바람이 부는 가을날, 낙엽이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모습이 생각났다. 

 

연주가 진행될수록 바이올린 파트는 완벽한 하모니를 들려주었다. 각 연주자들이 울리는 바이올린의 소리가 한 데 모아져서 깊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첼로의 제 2주제도 매우 아름답고 유려하게 들렸다. 나는 이 선율을 들으면 왠지 곡식을 수확하고 있는 시골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만큼 이 부분의 선율은 사람들로 하여금 넉넉하고도 푸근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선율인 것 같다.

 

1악장의 심오한 끝을 뒤로 하고 2악장이 시작되었다. 호흡이 길고 서정적인 주제로 이루어진 2악장은 목관악기 특유의 독특한 음색으로 매력을 뿜어냈다. 특히 클라리넷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선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현 파트의 pp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었는데 어떻게 많은 인원의 단원들이 저렇게 작은 소리를 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2악장은 전체적으로 음표가 많지 않아 음악이 복잡하고 어렵다기보다는 단순한 진행이었다. 하지만 그 단순한 진행 속에 왠지 모를 공허함이 느껴지는 곡이기도 했다. 그런데 2악장이 살짝 지루해질 무렵 갑자기 오케스트라가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듯하더니 음악이 끝나 버렸다. 나는 곡의 중간쯤에 나오는 클라이막스인줄 알았는데 음악이 그냥 그렇게 끝나 버리니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쉽게 박수를 칠 수가 없었다. 그 뒤에 무언가가 더 나와야 할 것 같았다. 아쉬웠다.

 

나는 부천 필의 미완성 교향곡을 들으면서 엄청난 무엇인가가 나올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었다. 하지만 부천 필의 연주는 화려하게 꾸미거나 과장하지 않은 정직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내가 기대한 음악이 치즈가 듬뿍 올려져 있는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피자 한 판이었다면, 부천 필의 연주는 정갈하게 잘 차려진 한정식과도 같은 음악이었다. 부천 필은 정해진 박자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시종일관 충실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잔잔한 듯하면서 호소력 짖은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휴식시간이 끝나고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이 연주되었다. 부천 필의 자세나 분위기는 1부에 비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일단 단원들의 수가 늘었으며 오케스트라에는 관 파트가 대거 투입되었다. 그리고 매우 조용하고 평안했던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과 달리 브루크너 교향곡은 비장하고도 열정적인 분위기였다. 브루크너의 음악을 들으면서 부천 필이 브루크너의 연주 효과를 위해 슈베르트를 유난히 더 차분하고 조용하게 연주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브루크너(Josef Anton Bruckner, 1824.9.4~1896.10.11)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서 오르간 연주자와 즉흥 연주자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바그너의 작품을 접한 뒤 창작에 자극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바그너를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브루크너는 낭만주의의 막바지에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과 씨름하였다. 이미 앞 세대 음악의 선배들은 완벽한 음악의 결정체를 보였으며, 이런 완벽한 음악들 사이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방안을 모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실험적인 면모를 띄기 시작했으며 절대음악을 중시하는 전통파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이런 과정 가운데서도 브루크너는 여전히 고전 음악의 거장인 베토벤의 영향을 받았다. 19세기의 모든 음악가들을 매혹 시킨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은 브루크너 교향곡 작곡상의 정점이었으며 브루크너의 9개의 교향곡은 모두 그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베토벤의 영향을 받은 브루크너는, 자신의 교향곡 9번 1악장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과 같이 d 단조로 웅얼거리듯 시작하여 광대한 선율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부천 필의 연주 중 현들의 트레몰로와 관의 연주가 언뜻 듣기에 맞지 않게 들리는 부분이 있었고 굉장히 혼란스럽게 들렸는데 이것은 브루크너가 의도한 것인지, 단원들의 실수인지 잘 알 수는 없었다.

 

1악장의 제2주제의 도입 시에는 ‘브루크너의 휴지’를 느낄 수 있었다. 브루크너는 하나의 주제로부터 다른 주제로 이동할 때 갑자기 멈추고 새로 시작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하였다. 음악 진행의 긴밀성과 논리성이 부족하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이는 브루크너만의 특유의 매력이다. 이렇게 브루크너는 잠시 동안의 휴지를 사용하여 새로운 주제로 넘어가거나, 어느 한 악기의 지속음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음악을 도입하는 작곡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또 브루크너는 음악에서 pp와 ff의 강한 대비를 사용하여 긴장과 이완의 묘미를 잘 보여주었다. 제2주제는 격하고 신비스럽고 모호했던 제1주제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으며 브루크너 특유의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었다. 브루크너가 이 교향곡을 사랑이신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는데 제2주제를 들으니 과연 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잘 표현된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의 반주를 바탕으로 하여 연주된 금관악기들의 하모니는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색다른 음색을 느끼게 해 주었다.

 

2악장 스케르초는 지금까지 들어왔던 교향곡들의 스케르초와 다른 음악이었다. 브루크너는 냉소적이고도 신랄한 화성을 사용하여 우리를 혼돈 속으로 빠뜨렸다. 관악기의 불협화음과 현의 피치카토가 더욱 그러한 분위기를 살려 주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분명 따뜻한 음악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긴장과 이완의 묘미가 2악장에서도 잘 나타났다.

 

3악장은 단 9도의 극적인 도약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브루크너는 화성을 해결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표류하는 진행을 보여 주었는데 이는 바그너에게서 영향을 받은 결과다. 여기서 부천 필의 연주 실력이 돋보였는데 특히 팀파니의 pp의 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선율은 시종일관 낮은 음들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음악을 들으면서 이것은 마치 브루크너의 죽음을 예고하는 듯한 선율이라고 느껴졌다. 슬프지만 평온한 선율이었다. 관악기의 지속음은 마치 오르간 소리를 연상케 하기도 했다.

 

부천 필이 연주하는 브루크너 교향곡을 들으면서, 나는 마치 브루크너는 만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브루크너에 대해서 좀 공부를 하고 들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브루크너의 내면 세계와 그의 삶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항상 음악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 중에 ‘작곡가와의 교감’이라는 말을 들었었는데, 나는 이날 부천 필하모닉의 연주를 들으면서 작곡가와의 교감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은 지 오래된 인물과 내가 그의 음악을 통해서 서로 교감한다는 것은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도 특별한 경험이다. 또다시 내가 음악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다.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연주한 부천 필은 정말 대단했다. 말러에 이어 브루크너 신드롬을 또 일으킬 것이 기대가 되었다. 부천 필은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 테크닉과 음악성이 대단했고 곡을 연주하는 내내 굉장한 집중력으로 곡을 이끌어 갔다. 부천 필을 이끈 지휘자 임헌정을 보면서는 그의 손끝, 몸짓대로 단원들이 반응하여 음악을 만들어가는 모습에서 마치 신(神)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단원들은 지휘자를 안 보는 것 같으면서도 지휘자의 표현대로, 지시대로 음악을 따라가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사실 음악을 표현하는 지휘자나 단원들도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이런 음악을 작곡한 브루크너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내면의 어느 깊은 곳에서 그런 음악이 나올 수 있었는지, 엄청난 음악을 작곡한 브루크너의 역량에 놀라고 또 놀랐다.

 


 

슈베르트와 말러 교향곡 사이의 공통점은 2가지였다. 두 곡 모두 미완성이라는 것과 베토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미 앞 세대에서 너무나 완벽한 음악의 결정체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현 작곡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도 두 인물의 공통점이었다. 두 인물은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요소가 강했던 음악을 작곡하면서 앞선 선배들의 음악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좌절하기도 하였지만, 슈베르트와 브루크너가 남긴 음악은 후대에 와서 이렇게 뛰어난 걸작이 되었다. 이렇게 두 인물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좋은 음악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훌륭한 음악을 우리에게 선사해 준 두 작곡가에게 감사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