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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향의 비창 - 10월 19일 (목)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오늘 저녁, 공연 2시간 전에 갑자기 표가 생겨서 러시아 낭만 음악의 진수를 맛보고 왔다.

안그래도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 을 정말 좋아한다고 글을 남겼었는데, 동생 지인이 야근으로 못 가게 되었다며 동생에게 표를 양도하게 된 신기한 우연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2번, 3번에 비해 비교적 덜 유명하지만, 예고 시절 음연 출판사의 한 직원으로부터 '라흐마니노프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CD를 선물받아 들어보고는 왜 1번이 인기가 없지? 하고 당황될 정도로 나에게는 좋아서 이 역시 매일 같이 듣던 곡이었는데, 오늘 이런 rare한 협주곡에,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 비창 교향곡에, 아시아 초연이라는 프란츠 슈레커의 에케하르트까지 듣고 왔으니 오늘은 나의 날. 완전히 감성지수 만족스럽게 충전하고 온 날이었다.

 

프란츠 슈레커의 '에케하르트' :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후기 낭만주의 음악 스타일의 작곡가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이기도 하고 나에게도 생소한 작곡가이다보니 오히려 이 곡을 어떠한 편견을 가지지 않고 들을 수 있었던 점은 좋았는데 사실 한 번 듣고 어떤 평이나 감상을 말하기가 참 어려운 곡이었다. 어떤 스토리가 있을 것만 같은 fantasia 같은 곡이었는데 그냥 심플하게 오케스트레이션의 풍부한 음향을 만끽했다. 한편 오늘 지휘자가 러시아 사람이어서 그런지 독일 작곡가의 곡에서 러시아 정서가 풍기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 :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가 17세였던 학생 시절에 쓴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 지휘자 바실리 시나이스키와 스티븐 허프의 만남. 러시아 지휘자와 영국 피아니스트의 만남이라. 피아니스트가 1악장 초반에 약간 흥분하여 지휘에 맞지 않게 다소 달리고 음악을 주도하는 모습이었고 오케스트라의 horn 음향이 피아노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들려서 잠시 밸런스가 깨어지기도 하였으나, 지휘자의 배려 때문인지 피아니스트가 금새 안정을 되찾고 안정적인 연주를 보여주었다. 화성 연타가 계속되므로 테크닉이 워낙 어려운 곡인데, 스티븐 허프는 차분한 절제 속 음악 하나하나를 예술적으로 계산하여 음악이 논리적으로 딱딱 떨어지는데, 들으면 굉장히 수긍이 가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음악세계를 보여주었다. 뭐랄까, 반 클라이번(Van Cliburn) 과에 속하는 피아니스트라고 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오늘 다소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힘이 딸려보이긴 했지만, 열정적이면서도 섬세한 그의 피아니즘이 돋보이는 협주곡이었다. 듣는 내내 내 손이 들썩들썩. 같이 호흡하였던 곡.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 : 서울시향의 단골 레퍼토리. 이건 그냥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곡이다. 그저..그저.. 정말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1악장의 그 유명한 낭만적 선율 부분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주제가 푸가적 발전을 할 때에는 살짝 베토벤도 생각이 나면서, Allegro의 16분 음표, Ostinato 음형, 2악장의 4분의 5박자 왈츠, 3악장의 빠른 8분음표 유형, 4악장의 많은 pedal point의 사용 등등.. 한 악장, 한 악장이 주옥 같고 버릴 것이 없다. 사실 초반에는, 전설적 지휘자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 그냥 이 곡 연주를 너무 잘해서 그의 풍부하고 넓은 음향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 지휘자인 바실리 시나이스키의 지휘가 성에 안 찰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는데(더 나와야 되는데 뭔가 덜 나온다는 느낌), 듣다보니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풍기는 그의 연주도 꽤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서울시향에게는 특히 클라리넷, 팀파니, 더블 베이스에 점수를 주고 싶다.

사실 오늘은 연주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음악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느끼고 온 듯 하다. 예전 같았으면 날카로운 비평이 끊이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요즘 나 진짜 많이 generous해진 듯.

더 하고 싶은 말 많지만 글자 수 제한으로 오늘은 여기까지.


20 Oct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