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삼성 리움(Leeum) 미술관 | 코리안 랩소디(Korean Rhapsody)와 상설전 | 부호들의 예술품 수집욕과 뮤지엄의 역할
Olivia올리비아 2021. 12. 4. 16:19삼성 미술관 Leeum(리움)은 대중에게 공개된 '개인 갤러리'일까?
지난 3월에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국립중앙박물관('실크로드와 둔황전')을 다녀왔는데, 오늘은 그와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의 거대 기업, 삼성이 운영하는 사립 미술관 Leeum을 찾았다. 난 리움을 방문해 본 적도 없고, ‘리움’ 하면 박물관 앞에 설치되어 있다는 거대한 청동 거미 작품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미술관을 찾기 전 일단 이곳이 어떤 미술관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설립자의 인사말부터 시작하여 현재 진행 중인 전시 안내와 이용 방법 등이 자세히 나와 있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리움’이라는 이름이 설립자의 성 Lee와 미술관을 뜻하는 영어 어미인 -um이 만나서 합성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다르게 이름부터 벌써 사적 소유 미술관이라는 냄새가 확연히 풍겼다. 설립된 지 10년이 채 안 된 미술관의 목표와 야망은 엄청났다. 한국미술이 나아갈 방향 제시, 전 세계 미술의 교감과 소통, 관람객을 위한 열린 교육, 문화 쉼터 등등.. 설립자가 미술관을 세울 때 얼마나 큰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야심차게 세운 미술관인지가 느껴졌다.
그런데 문득 인사말과 비전 등을 보고 있자니 2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삼성가가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들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함으로써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예술을 공유하려는 마음, 두 번째는, 삼성이 어떻게 이렇게나 많은 미술품들을 모아서 미술관까지 만들 수 있었을까, 이 미술관은 결국 대중에게 공개된 삼성의 '개인 갤러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또한 히틀러가 떠올랐다. 과거 히틀러는 전시(戰時) 중에도 미술품 구입에 그렇게 열을 올렸고, 도시 파괴자로 유명한 그였지만 반면 뛰어난 문화유산이 살아 있는 도시는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둔 그이다. 무엇이 이토록 정치가와 기업인들로 하여금 예술품들의 수집과 보존에 욕심을 내게 만드는 것일까? 예술품을 사들이고, 보존하고, 전시하는 것은 소위 돈이 있다는 사람들의 사회적 책임이자 임무인 것일까? 나는 그 궁금증을 안고 미술관을 찾았다.
Korean Rhapsody - 민족적 색채가 짙게 묻어났던 전시, 코리안 랩소디
지금 Leeum에서는 한국 고미술품과 현대 미술품들이 주를 이루는 상설 전시회와 함께, <Korean Rhapsody> 라는 기획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상설만 보면 1만원인데, 기획 전시회까지 2개의 전시를 한꺼번에 보는 Day pass는 1만 3천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볼 수 있어서 이왕 가는 김에 두 전시를 다 보기로 했다.
미술관에 가기 전에는 미리 전시 설명 프로그램 시간을 알아보고 갔다. 원래는 상설 전시회가 이 미술관을 대표하는 main이라고 생각을 해서 상설 전시 도슨트 설명 시간에 맞춰 미술관에 갔는데, 티켓을 끊자 마침 <Korean Rhapsody> 전시 담당 도슨트가 중앙 로비에서 출발하려고 하여 이 도슨트를 따라가 봤다. 사실 도슨트의 설명을 듣는 것은 아주 처음은 아니었지만, 출발할 때부터 도슨트를 이렇게 따라가는 것은 처음이어서 기대되고 설레었다.
도슨트는 먼저 전시관 입구에서 Korean Rhapsody의 제목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랩소디'는 형식이나 내용이 비교적 자유로운 환상 기악곡을 뜻하는데, 이 제목처럼 이번 전시회는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미술 작품들을 자유롭게 병렬식으로 보여주는 전시회라고 했다. 설명을 듣자 전시 동선에 관한 이해와 납득이 잘 되었다.
그렇게 해서 전시장에 들어간 나는 도슨트로부터 몇몇 주목할 만한 작품들의 설명을 들었는데, 나 혼자서 자유롭게 그림을 봤다면 그냥 스치고 지났을법한 그림에 나타난 시대 배경이나 역사, 작가의 생각과 표현 방식 등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어 매우 흥미로웠다.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니 작품에 많이 공감이 갔고, 작품 하나하나를 자세히 보며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1시간 남짓한 도슨트 설명 프로그램이 끝나고 전시장을 다시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번 Korean Rhapsody를 보면서 시종일관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예술가와 시대상에 대한 생각이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시대 흐름과 사상, 사건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일본으로 미술 유학을 가서 일본 화풍의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말년에는 조국의 역사와 관련된 그림을 그린 화가, 일본의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을 받아 일본 심사위원들에게 조선의 황토색을 잘 표현했다는 이유로 호평을 받았지만, 반면에 조선의 원시적이고도 야만적인 색깔을 표현했다는 혹평을 받은 이인성 화가의 작품,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을 비판하며 현모로 돌아와 달라는 작품을 그린 이응노 화가의 ‘양색시’, 마치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모던 걸’과 초가집과 양복을 입은 신사의 상반된 이미지를 그린 이동기 화가의 작품 등이 그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이 드러난 작품들도 몇 점 있었는데, 조선을 폭도로 묘사하며 근대 일본의 시선을 보여준 일본 화가 우키요에의 작품을 보면서는 나라와 개인의 입장과 관점 따라 이렇게도 얼마나 상반되고도 왜곡된 역사 기록이 가능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분명 회화는 사실로서의 역사 기록을 담고 있지만 그 보는 관점과 입장에 따라서 역사 왜곡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또 회화였다. 그래서 회화는 정치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꼭 회화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이 그 작가가 살았던 시대상을 피해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몽주의와 보편성의 철학을 담은 음악을 썼던 Mozart나 Beethoven,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작곡한 Debussy 등 수많은 작곡가들의 음악을 살펴봐도 그 시대상이 여실히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작품들을 보니 나는 과연 어떻게 이 시대상을 내 음악에 담고 표현해 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이렇게 과거의 역사는 현재로 그대로 흐르고 있음을 시사하는 작품들도 있었다. 한복을 입은 어머니와 양장 차림을 한 딸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고, 캔버스 천을 풀어내어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며 소통함을 보여주는 조덕현의 <Reflection reflection>, 앨범식의 액자 구성으로 작가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의 삶 속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개인사와 역사의 결합, 그리고 그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인 조동환, 조해준의 <1937년부터 1947년까지>, 6.25 전쟁 때 아들을 잃은 101세 어머니의 담담한 모습을 담은 구본창의 <어머니 전상서 철모> 작품, 그리고 한 장소의 모습이 ‘과거’와 ‘현재’의 위치에 각각 서면 옛 모습과 현재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던 스크린 작품이 그것이었다. 전시는 이렇게 한국 근대사의 엄청난 사건들을 보여주며 그 역사가 한 개인의 삶과 어떻게 결부되어 가는지 보여 주었고, 이런 어두운 역사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풍자하는 동시에 때로는 간단한 1장의 사진을 통한 상징과 압축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담담한 시선으로 비추고 있었다.
전시 동선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동선에 위치한 신학철의 <한국 근대사 종합>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의 전시를 요약하고 정리하는 듯한 느낌의 작품이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얼마 전 ‘실크로드와 둔황’에서 본 복희여와도를 떠올리게 하는, 남녀가 꼬여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림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근대 문명의 상징인 코카콜라, 야마하 등의 브랜드 이름들과 전쟁을 상징하는 투구, 총탄, 폭탄, 산업화를 상징하는 기계, 현대 문명의 이기와 파괴를 상징하는 칼과 죽은 사람들, 근대의 역사적 인물인 이승만 등이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작품의 규모도 규모였지만 모든 것들을 포괄하며 그림 하나로 표현하고 있는 실로 엄청난 작품이었다. 이 작품과 함께, 여전히 역사는 흘러가고 있으며 우리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발과 파괴, 인간소외의 문제점을 그린 <서울, 침묵의 풍경>, 근래의 다문화 가정의 소외와 편협된 시각을 담담하게 비판하고 있는 <해피 투게더>, 다국적 기업과 fast food가 인간 정신을 잠식하고 있음을 풍자한 <거미와 코카콜라가 있는 정물>, <Coca Killer>는 현재의 시대상과 사회 흐름을 조망하는 역할을 하며 그렇게 전시는 끝났다.
전시를 보고 나오면서 난 이 전시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랩소디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곡이지만, 민족적 선율과 느낌이 잘 드러난 서사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크로드와 둔황’이라는 사실적인 이름의 전시 제목과는 달리 이 전시는 'Korean Rhapsody'라고 이름을 붙여 약간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이름이었지만 도슨트가 제목 설명을 잘 해주기도 했고 Rhapsody라는 이름의 친숙성 때문인지 그만큼 더 전시에 흥미가 있었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지고 전시를 관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은 도슨트 설명 시간이 1시간으로 제한이 되어 있어서 그런지 설명이 너무나 빨라서 이동하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둘러보며 궁금한 것들은 그때그때 질문하며 생각까지도 주고받을 수 있는 개인 도슨트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설전시관 - 뮤지엄 1, 뮤지엄 2
[Korean Rhapsody]를 관람하느라 벌써 2시간이 훌쩍 지났다. 부랴부랴 뮤지엄 1으로 가서 4층부터 전시품들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뮤지엄 1을 관람하면서 놀랐던 것은 삼성이 collecting한 국보급 보물들이었다. 전시실 자체도 이름만 미술관이지 마치 귀족의 갤러리를 보는 듯했고, 삼성이 어떻게 이런 국보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 놀라웠다. 사설 미술관이 이렇게 국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가능한지도 궁금해졌다.
그 놀라움 뒤에 보이는 고려청자, 조선의 백자들, 불교 작품 등을 정말 그 무늬와 디테일이 놀라울 만큼 아름답고 정교했다. 하나하나 어떻게 그렇게 세세하게 그림을 그려 넣었는지, 옛날 유럽인들이 동양의 자기들을 보고 욕심을 냈을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실에는 작품 하나하나를 돋보이게 하는 조명 장치도 잘 설치되어 있어서 작품의 진귀함이나 그 뛰어남을 잘 드러나게 하고 있었다.
4층부터 시작된 전시 동선은 로툰다 계단을 따라 쭉 내려갔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을 떠올리게 하는 원형의 나선형 로툰다 계단을 따라 이어지는 전시 동선은 정말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선이었고 그 때문에 피곤함이 덜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뮤지엄 2는 현대 미술 작품들을 병렬식으로 모아 놓아서 그런지 뮤지엄 1보다는 전시 동선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화살표가 있어 잘 따라갈 수 있었는데 중간중간 다른 동선으로 돌며 관람하는 관람객들과 부딪치는 사태도 발생했다. 확실히 병렬식으로 전시되어 있었던 [Korean Rhapsody]나 뮤지엄 2보다는 뮤지엄 1의 동선이 더 매끄럽고 유연했다.
한편, 뮤지엄 2에 들어가 현대 미술 작품들을 보니 마음이 밝아지고 생각이 유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앞서 봤던 [Korean Rhapsody]의 근현대 미술 작품들은 주로 정치적 사건이나 사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풍자한 데 반해, 현대 미술 작품들은 인간 소외, 고뇌 등을 표현한 다소 복잡해 보였으며 untitled라고 붙여진 작품의 제목들도 많았다. 그림을 보는 순간 그 의미나 의도가 명확하게 확 다가오지는 않기 때문에 뮤지엄 2에서는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봐야 했다. 그러나 현대 미술은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사실주의 회화와는 달리 작품을 보는 관객들도 작품을 보며 얼마든지 상상력을 발휘하고 재해석하며 작가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 같다.
전시를 둘러보고 나서...
한마디로 흥미롭고 재밌었다. 이렇게 한 미술관에서 아름다운 많은 예술 작품들을 1만 원이라는 돈으로 관람할 수 있다니, 정말 reasonable한 가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편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시품들의 상당량이 삼성 미술관 소유인데다가 ‘국보’라고 적혀진 우리나라 보물들도 꽤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토록 개인으로 하여금 아름답고 미술작품, 심지어 국가의 보물까지도 사들이고 소유하게 하는 것일까?
집에 돌아온 나는 히틀러와 상류층들의 예술품 수집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검색해 봤다. 그러니 개인이 쓴 글부터 전문가가 쓴 글까지 다양한 글들이 나왔는데, 히틀러는 어릴 적 꿈꿨던 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해 예술품 수집에 집착했다는 이야기부터 국내에서는 고가 미술품의 특별한 용도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얼마 전 삼성가가 한 사찰과 대립하여 승소하였다는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삼성이 승소했다는 작품은 뮤지엄 1의 1층에서 맨 마지막에 보았던 눈에 띄게 크고 아름다웠던, 어떻게 이것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양호한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을까 감탄하면서 본 작품이었던 우리나라 국보 213호인 금동대탑이었다. 이 작품은 청동에 금박까지 입힌 현존하는 최고 수준의 금속탑인데 이 작품이 2년여의 소송 끝에 얼마 전 결국 삼성 소유로 돌아갔다는 뉴스 기사를 발견하였다. 뉴스 기사는 ‘삼성이 소유하고 있는 국보 문화재는 모두 37점, 대한민국 전체 국보의 12%입니다.’로 마무리되었는데, 이는 소위 돈 있는 사람들의 예술품 수집에 대한 야망과 욕심이 얼마나 큰지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부자들, 정치인들이 이렇게도 예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찾아보니 미술품과 예술작품은 그 자체가 후손에게 남겨줄 수 있는 유산이 되며, 미술품 구입에 세금이 붙지 않아 비자금 조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가의 미술품을 이용한 부의 대물림 현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삼성 미술관’이라는 이미지는 공익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다. 뭔가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미술관이 대중에게 미술 작품의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영감을 얻게 하며,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 쉼터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간과할 수 없다. 삼성가가 부자들이 예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는 위의 이유와 같은 이유로 예술품 수집을 하고 있는지는 알바가 없지만, 국가의 보물과 높고 중요한 가치가 있는 예술 작품들이 부의 대물림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좋지 못하다. 한 작품에만 몇 십억을 호가하는 예술 작품들은 소위 이렇게 돈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더 빛을 발하기도 하고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결국은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 예술 작품들을 보존하고 다루느냐에 따라서
개인이나 한 시대의 역사를 담은 예술 작품들은 매장 당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삼성 리움 미술관의 상징이기도 한 옥외에 설치된 거대한 설치작품 청동 거미상. 알을 품고 있는 모성애를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과연 리움 미술관은 조국의 보물을 지키는 어미와 같은 상징일까, 아니면 예술품 수집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찬 히틀러와 같은 자화상일까.
아무쪼록 삼성 미술관이 예술 작품들을 잘 보존하고 전시하고 연구하여 역사적, 미적 가치가 높은 예술 작품들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며 대중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수준 높은 교육의 장이자 문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관에서 인상적이었던 전시품 한 점을 드로잉(Drawing)
-작가 : 이응노(1904~1989)
-제목 : 거리 풍경-양색시(Street Landscape : Western-style Maidens)
-제작연도 : 1946
-재질 : 종이에 수묵담채
(작품 안에 등장인물이 많아 다 그리진 못했고.. 가장 중심에 있는 여인과 선글라스에 양복을 착용한 남자와 한복 입은 여인, 아이 등 눈에 띄는 핵심들만 그렸다. 내가 그린 그림도 블로그에 올리면 좋으련만.. 패스!)
-드로잉 하게 된 동기 :
이 그림은 보면 볼수록 나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그림이었다. 드로잉은 다 하지 못했지만 작품을 보면 뾰족구두를 신고, 핸드백을 들고, 과감한 헤어스타일에 짧은 치마를 입은 ‘양색시’들이 중앙에 있고 그 뒤로 양색시들을 바라보는 다양한 표정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오른쪽 하단에는 ‘그들의 자태를 바라볼 적에 눈물이 앞을 가려 마지않는다. 하루라도 빨리 반성하여 새 옷을 벗고 직장으로, 제이국민의 현모양처가 되어주기를 원하노라.’라고 화가가 적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작품이 제작된 것은 1946년, 해방이 되고 나서 얼마 안 된 시점인데 글쎄, 이렇게 여성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자신의 몸매를 최대한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던 것이 과연 그들이 단순히 이런 스타일을 지향했기 때문일까?
작가는 이 양색시들이 반성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위와 같은 글까지 적어 넣었지만, 왜 이 여성들이 전통적인 복장을 버리고 이렇게 거리를 활보할 수밖에 없었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런저런 자료들을 찾아보니, 해방 직후 먹고살기 어려워진 우리네 여인들이 그 당시 우리나라에 상주하고 있던 미군에게 색을 팔았으며 이런 사람들을 ‘양공주’나 ‘양색시‘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림을 보면 뒤에서 양복, 검은색 안경을 착용하고 지팡이를 들고 걷고 있는, 완전한 양장 차림을 하고 있는 남자들이 있는데 이 남자들 역시 양색시들에게 조소를 보내고 있고, 전통 복장을 입은 여인들과 어린아이들도 큰 구경거리가 난 양 양색시를 주목하고 있다. 생존을 위해 뭇사람들의 손가락질도 개의치 않았던 양색시들의 삶이 참 안쓰럽고도 안타깝게 느껴지는 동시에, 왜 양장 차림을 한 남성들은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이 작가 또한 여성들에게만 비판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생각을 해 보건대 아마 남성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미군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한마디로 미국에 몸을 팔고 있는 여성들을 한심하고도 수치스럽게 여기던 시대 풍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몸을 팔 수밖에 없는 여성들을 안타까운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왜 이들이 이런 삶을 살 수밖에 없었나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남자들의 표정은 이 당시 여성의 지위나 삶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한편, 작가가 왜 종이에 수묵담채로 이 그림을 표현했을까 궁금했다. 양색시들이 이렇게 서양 문물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사회 풍조를 흐린다는 생각 때문에 작가는 일부러 한국 고유의 재료인 한지를 사용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응노 화가에 대해 알아보니 ‘서예적 추상이라는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했던 화가’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1958년 파리로 건너가 서양미술의 본고장에서 한지와 수묵이라는 동양화 매체를 사용해 스스로 ‘서예적 추상’이라고 이름 붙인 독창 세계를 창조했다는 이응노 선생이니 한지 위에 수묵담채로 표현한 것은 그의 고유의 작품 스타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어쨌든 이응노 화가의 <양색시> 그림을 보고 있자니 해방 이후라는 역사적, 시대적 배경 위에 위치한 그림 속의 개인들에게 왠지 정감과 연민이 느껴졌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결국 개인의 삶은 아프든, 그렇지 않든 흘러가고 있었고 그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힘들든, 덜 힘들든 모두가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모습들이 그림 위에 스치는 듯하여 조금은 삶의 위로를 얻었다.
12 Apr 2011